리카싱 _중국인 최고의 갑부
행운을 기다리기보다는, 내가 먼저 목표를 설정하고 죽을 힘을 다해 그 목표를 달성한다.
아시아 최고 부자의 한 사람인 리카싱에게는 ‘슈퍼맨’이란 별명이 따라다닌다. 그는 빈곤한 가정에서 성장하여 초등학교를 가까스로 마친 학력으로 플라스틱 제품 세일즈맨을 거쳐 부동산, 항만, 텔레커뮤니케이션, 재정, 인프라, 바이오테크놀러지 등을 아우르는 다양한 분야들에 사업 영역을 펼쳐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2006년 현재 123억 달러라는 천문학적 액수의 재산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는 무서울 정도로 근면하고, 또 검소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리카싱(李嘉誠)은 1928년 중국 본토의 광동(廣東)성 조주(潮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운경은 소학교 교장을 지낸 인텔리였지만 리카싱이 태어났을 때는 몰락하여 끼니 잇기도 힘들 정도였다. 따라서 리카싱은 초등학교 이상의 정규교육은 받을 수 없었다.
리카싱의 가족은 1940년, 즉 그가 12살 때에 중국 본토의 정치적 혼돈을 피해 홍콩으로 이주하여 가난한 이민자의 삶을 시작했다. 그들은 상당히 부유했던 친척 아저씨의 집에 얹혀 살았는데, 그 아저씨는 지극히 교만하여 리카싱 가족을 무시하곤 하였다. 리카싱은 그때 자신도 언젠가는 부자가 되리라, 그리고 자신은 아무리 돈을 많이 벌더라도 저렇게 교만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곤 했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돈벌이에 뛰어든 것은 아버지가 홍콩에 온지 3년만에 사망하면서부터였다. 15살의 어린 나이로 온 가족을 부양할 책임을 지게 된 것이었다. 그는 아저씨의 가게에서 시계를 팔기 시작했다. 그는 상상을 초월하는 근면과 열성으로 17살에 이미 그 가게에서는 최고의 세일즈맨으로 올라설 수 있었고, 19살에는 총지배인이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그가 판 시계의 숫자가 다른 판매원들의 100배에 달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면서 아저씨의 가게를 그만두고 다른 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금속식기류 파는 일을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는 하루에 16시간을 일했다. 낮에는 물건을 팔러다니고, 밤에는 주문받은 량을 확보하기 위해 공장에서 대기했다. 그 과정에서 제조 비즈니스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그가 받는 커미션은 회사 내에서 최고로 많았는데, 두 번 째로 많이 받는 사람의 7배에 달했다. 그는 그때부터 언제가는 홍콩의 정치, 경제, 문화를 틀어쥐고 있는 영국인들과 사업할 것을 다짐하했고, 그 목적을 위해 개인교사를 두고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그 덕분으로 아주 유창한 영어를 구사한다.
리카싱은 공장 운영에 대해 완벽히 터득한 다음, 직접 사업을 벌리기로 하고, 1949년 가족, 친구, 세일즈 활동으로 알게된 사업자들로부터 자금을 빌려 플라스틱 제조공장을 설립했다. 그는 자신의 회사에 중국에서 제일 긴 강인 장강(長江. 양자강)의 이름을 따와 붙였다. 장강이라는 이름이 장강의 수 많은 지류(支流)를 포함하여 무궁한 발전을 암시할 뿐만 아니라, 사업적 동맹이나 제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고, 또 중국인에게 있어서 강은 물, 물은 돈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사업 성장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종교서적을 대하듯 각종 비즈니스 서적들을 정독했다. 그 과정에서 미국과 유럽 사람들이 홍콩이나 중국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유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들이 플라스틱 조화를 무척이나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런 조화를 만들어 팔면 돈을 많이 벌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플라스틱 조화로 유명한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그 제조법을 배우기 위해 신분을 숨기고 한 공장에 취직하였다. 비록 청소부였지만 친구들로부터 플라스틱에 색감을 입혀 진짜 꽃처럼 만드는 그 당시의 첨단 기술을 습득할 수 있었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공장을 조화 제조에 적합하도록 새롭게 정비하고, 최고기술자들을 초빙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그는 바이어가 공장 견학을 왔을 때 유럽 수준에 뒤지지 않는 제품을 생산하여 보여주었고, 바이어는 품질이 유럽 수준에 뒤지지 않으면서 가격이 저렴하다는 사실에 대량으로 물건을 주문했다.
리카싱은 그로부터 수년 후, 아시아의 최대 플라스틱 꽃 제조업자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고, 또 엄청난 돈을 벌었다. 그가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을 때, 누군가가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회장님은 그때 큰돈을 번 것이 행운 때문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는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전 다만 제가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죽도록 일했을 뿐이었습니다.”
1958년 공장 부지의 주인이 월세를 올리려 하자, 리카싱은 이미 부를 상당히 축적한 상태였던지라 아예 그 터를 사버렸다. 그로서는 첫 번째 부동산 투자였던 셈이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회사를 부동산 개발과 관리 체제로 탈바꿈시켰다.
리카싱은 건물을 짓기 위해 부채를 얻는 행동을 좀처럼 하지 않았다. 땅 주인과 합자형식을 취하던지, 아니면 사전에 아파트를 친구들이나 아는 사람들에게 팔았기 때문이었다. 부채로 인한 위험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자신과 투자자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과정을 통해 사업은 꾸준히 성장했던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1967년 본토에서 문화혁명으로 인한 폭동이 발발한 것이었다. 부유층들이 그 여파가 홍콩에까지 미칠 것이라는 두려움에 빠져 알토란 같은 부동산들을 헐값에 팔아넘기고 미국이나 유럽으로 이민을 떠나는 것이었다. 리카싱은 문화혁명은 일시적인 사건으로서 홍콩에 전혀 부정적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리라 판단하고 좋은 부동산을 대량으로 사들였다.
그가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고 있던 1977년,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허치슨 인터내셔널(Hutchison International)사와 홍콩 앤드 홤포아 독(Hongkong & Whampoa Dock)사가 합병되어, 허치슨 홤포아(Huchison Whampoa)사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허치슨 인터내셔널 사는 1880년에 설립된 기업이었고, 홍콩 앤드 홤포아 독은 1861년에 홍콩 최초의 기업으로 등록된 유서깊은 기업이었다. 리카싱은 1979년 홍콩 앤드 상하이 은행(Hongkong & Shanghai Bank)로부터 허치슨 홤포아의 주식 23 퍼센트를 사들임으로써 중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홍콩 경제를 주도하는 영국의 가장 오래된 기업의 하나를 장악하게 시작했다.
허치슨 사는 1980년대에 자사의 콘테어너 항만을 대폭 확대하였고, 1985년에는 홍콩전자유한공사(Hongkong Electric Holdings)사의 주식 33퍼센트를 사들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두 아들이 교육받은 캐나다에까지 사업영역을 넓혀 캐나다 임피리얼 상업은행(Canadian Imperial Bank of Commerce)과 허스키 오일(Husky Oil)에 상당 금액을 투자했다.
리카싱은 그후에도 허치슨 사에 대한 자신의 자산을 늘려 2004년 현재 49.9퍼센트의 주식을 소유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허치슨 사에 대한 지배권을 이용하여 사업영역을 다각도로 확장하여 ‘슈퍼맨’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
리카싱은 부동산 사업을 시작하면서, 홍콩의 최대 부동산 재벌 자딘 매씨손(Jardine Matheson)을 앞지르겠다는 야망을 불태웠다. 자딘은 스코트랜드 출신의 마약상인 윌리암 자딘과 제임스 매씨손에의해 1832년 설립된 회사였다. 윌리암과 제임스는 중국 사람들에게 아편을 팔아 챙긴 자금으로 좋은 부지를 사들였고, 그곳에 건물을 지어 비싼 값에 팔아오는 방식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해왔던 것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홍콩 중심부에 상당한 부동산을 가지고 있었다. 라카싱의 부동산 사업이 비약적으로 성장하자, 자딘사는 1980년대에 장강그룹에 합병될 것을 두려워하여 각종 묘책을 강구하여 실시하다가, 홍콩이 1997년 중국에 반환되면서 철수하였다. 장강은 물론 그들이 소유했던 부동산들을 사들였다.
리카싱은 1985년 홍콩에 설립한 무선통신회사 허치슨 텔레커뮤니케이션(Hutchison Telecommunications)사가 1990년대에 비약적으로 성장하자, 유럽에 오렌지 PCS 모빌 네트웍을 구축하여, 1999년에 146억 달러를 받고 마네스만(Mannes-man)에 매각했다. 뿐만 아니라 1991년에는 모든 전문가들의 부정적인 의견에도 불구하고 차남 리처드의 조언을 받아들여 위성 스타 채널을 설립하여 크게 성공을 거둔후, 1993년에 호주의 미디어재벌 루퍼드 머독에게 5억 2,500만 달러를 받고 매각하였다.,
리카싱 비즈니스의 근간을 이루는 양대기업, 즉 장강과 허치슨은 법적으로는 독립체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회사인 셈이다. 장강이 허치슨의 주식 49.9퍼센트, 허치슨이 장강의 주식 85퍼센트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장강은 현재 바이오테크놀러지와 인터넷 서비스에까지 사업 영역을 넓힌 상태로 17만 5천여명의 직원이 39개국의 지사들에 흩어져 일하고 있다. 2004년 전반기 현재 장강 그룹이 홍콩 주식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1.5퍼센트에 달한다고 한다. 허치슨 홤포아는 2004년 현재 세계최대의 항만회사로서의 위치를 고수하면서, 소매와 제조업에도 진출하여 총 매출액의 4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게 하는 등의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비록 아버지 이운영이 정치적인 혼란을 피해 중국본토에서 홍콩으로 이민왔지만 리카싱은 경제 및 정치적으로 중국 본토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그는 중국과 영국이 홍콩의 장래에 대해 협상을 벌일 때 등소평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또 홍콩 헌법 제정 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전에는 주은래, 그후에는 장쩌민 주석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항만, 인프라스트럭쳐, 부동산 개발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했다. 1981년에는 자신의 고향인 광동성 부근에 산터우 대학을 설립하고 1억 5천만 달러를 기증하기도 했다.
본토 중요인사들과의 밀접한 관계로 인해 그는 큰 위기에서 벗어난 적이 있다. 1996년 그의 장남이 납치되었던 것이었다. 그때 그는 홍콩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기 보다는 중국정부에 도움을 요청했다. 리카싱은 1억 2천만 달러를 주고 아들을 찾아올 수 있었고, 중국 정부는 1998년에 범인들을 체포하여 사형에 처했다.
중국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지면서 미국 정치인들이 파나마 운하 운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에 대해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중국 편향적인 자세로 인해 미국에 불리한 일이 파나마에서 벌어질 수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리카싱은 겸손한 성격에 검소한 삶을 영위해왔다. 그는 1981년에 5억 달러의 기금으로 리카싱 재단을 만들어 건강과 교육에 관한 복지활동을 펼치고 있다.
리카싱은 2006년 현재, 78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현역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 두 아들도 세계를 무대로 맹렬한 비즈니스 활동을 펼치고 있다. 막내 리차드는 자신의 회사 퍼시픽 센츄리 사이버웍스(Pacific Century CyberWorks)을 통해 인터넷 사업을 펼치고 있는데, 2000년에는 홍콩 케이블 앤 와이어리스(Hong Kong Cable & Wireless)사를 인수한바 있다. 리카싱의 후계자로 여겨지는 장남 빅터는 장강 그룹의 부회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하버드 비즈니스 저널은 리카싱의 삶을 이렇게 정리했다:
중국 본토에서 교육자의 아들로 태어나 소박한 삶을 시작하여, 피난민, 그리고 세일즈맨을거쳐 성공의 가도를 달리면서 그는 성실성과 적응력이라는 교훈을 제시해왔다. 근면과 진실성으로, 그는 금융, 건설, 부동산, 플라스틱, 휴대폰, 위성 방송, 시멘트, 소매업, 호텔, 국내운송, 공항, 전력, 철강, 항만, 선박 등을 포함하는 비즈니스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팁: “기회는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기회를 손쉽게 잡을 수 있을 거라는 나태한 생각을 한다면 기회는 결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리카싱